글,사진_아나드론

ANA DRONE, JAN 2019

 

당신은 거기 있다!”

<당신은 거기 있다!(You are there!)>는 1953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CBS 방송국에서 방영한 역사 재현 TV 다큐멘터리이다. 뉴스 진행자를 ‘기자’와 ‘시청자’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닻(anchor)’으로 부르게 만든 최초의 남자, ‘뉴스 앵커’의 발원지였던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 1916~2009)가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을 단숨에 사건•사고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였다. 시청자들은 오프닝을 듣는 순간 마치 자신이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신은 거기 있다!”는 비장한 오프닝은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도 저널리즘의 명대사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월터 크롱카이트의 오프닝 멘트가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몰입감’과 ‘동일시’였다. 앵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청자들은 자신이 지닌 모든 감각을 역사의 현장에 내주었다. 물론 그 한마디만으로 현장의 기자와 시청자가 일체화되는 교감을 성립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50년이 흐른 지금도 저널리즘의 가장 큰 고민은 여전히 그 때의 몰입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데서 크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월터 크롱카이트 이후 무엇이 변하고, 변하지 않은 것일까? 시대가 바뀌고 방송 기술이 달라졌다. 재현 다큐멘터리의 형식이나 컴퓨터 그래픽 기법도 크게 변했다. 하지만 콘텐츠에 반응하고, 현장에 몰입하며 동일시되기를 자청하는 시청자들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욕망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VR 기술, 새로운 영역 개척에 응답하다

21세기에 VR은 과연 어느 영역에서 자신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것일까? 군사 훈련용으로 처음 응용되며 두각을 나타냈던 VR 기술의 활용도는 현재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건축과 의료 분야에서 새로운 성과를 낳고 있다. 건축가는 고객에게 의뢰 받은 건축물의 설계 도면이 완성되면 거기에 맞춰 VR 건축물을 지어놓은 후 고객에게 보여줄 수 있다. 실물 모형보다 훨씬 정확하게 건물의 실제 이용 양상을 체감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의료 분야에서 응용하고 있는 VR 기술도 이에 못지않게 활발하다. 수술·진단·심리치료 등 여러 측면에서 신입 의사들을 교육하기 편리할 뿐 아니라, 로봇 장치를 이용한 원격 수술도 진행하고 있다. 최초의 원격 로봇 수술은 이미 지난 1998년 프랑스 파리 소재 한 병원에서 이뤄졌다.

 

 

미국 에모리대와 조지아공과대 테크놀로지연구소에서는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증 환자를 치료하는데 VR을 선구적으로 적용했다. VR 기술을 활용, 개에 대해 극심한 공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개를 계속 만지게 함으로써 공포감을 줄이는 방식이다. 이 같은 치료법은 이미 상당수의 국가에서 활용되고 있다.

VR 기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대표적인 분야 가운데 하나는 교육이다. 비행접시를 타고 있는 것처럼 우주 공간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VR 경험을 통해 지구의 자전·공전을 비롯한 우주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면 우주에 대한 이해와 관심 수준이 단번에 높아질 것이다. 실제 사례도 있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데이비드 아텐보로와 VR용 영상제작사 알케미 VR(Alchemy VR)은 런던에 소재한 국립자연사박물관과 손잡고 미니 다큐멘터리 시리즈 <최초의 생명(Firt Life, 2010)>을 15분가량의 가상현실 영상으로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고생대 모형과 화석을 박물관에서만 접하지 않고 해당 시대의 바다 속에 직접 들어가 경험할 수 있게 됐다.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굶주림(Hunger in Los Angeles)>, VR 저널리즘에 진출하다

VR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와 서비스,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내고 있다. 노니 드 라 페냐(Nonny de la Pena)는 하버드대에서 시각예술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뉴스위크 특파원, TV 프로그램 작가 등으로 경력을 쌓은 뒤 2007년 미국의 VR 다큐멘터리 제작사 엠블러메틱 그룹(Emblematic Group)을 창설했다. 그녀는 존재의 ‘이원성(duality)’이라는 특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여기(here)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그곳(where)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존재이므로 사람들이 현실과 VR을 혼동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우려라고 생각하고 있다. 2010년 그녀는 미국 빈민층의 실태를 알리는 보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로스앤젤레스의 푸드뱅크(무료급식소)를 현장 취재했다. 자신이 본 참혹한 상황을 현실감 있게 전달하고 싶었던 그녀는 VR 카메라로 촬영한 360도 영상을 제작했다.

 

 

공개 당시 VR용 고글(VR 기어)을 착용한 시청자들은 급식 배급소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피곤에 찌든 사람들민이 몸을 겨우 가눈 채 하염없이 서 있었다. 어느 순간 앞에 서 있던 한 남자가 갑자기 저혈당증으로 쓰러지고 온몸이 경련으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남자를 둘러싸는 틈을 타 일부는 새치기를 시도한다. 보안요원들은 질서를 잡으려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이 모든 광경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된 가상현실이었다. 빈민가 한복판을 가상현실로 제공함으로써 빈곤층의 참상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게 만든 이 다큐 영상은 기존 저널리즘의 무기였던 활자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에 충분히 응답하며, VR 저널리즘의 출발을 알렸다. 2012년 그녀는 마침내 VR 저널리즘의 선두주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아’라는 이름으로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한 VR 미니 다큐멘터리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굶주림(Hunger in Los Angeles)>이 가져온 명성이었다. VR 기어를 착용하고 체험한 이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쓰러진 남자를 밟지 않으려 황급히 물러서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며 “저 남자를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프로젝트 시리아(Project Syria)>

노니 데 라 페냐는 저널리즘의 미래에 디지털이 있고, VR이 생생한 뉴스 현장을 전달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엠블러매틱 그룹을 설립하기 전까지 그녀는 언론인으로 살아오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만드는 이야기길 구성해야 한다고, 그렇게 배웠고 또 그렇게 일했다. 신문과 잡지사에서 일했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으며, 방송 분야에도 종사했다. 하지만 비로소 사람들이 보인 치열한 반응을 목격한 것은 VR로 작업하면서였고, 그녀도 곧 거기에 매료됐다. 2016년 11월 서울을 방문한 그녀는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6 넥스트 콘텐츠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저널리즘의 미래에 디지털이 있고, VR이 생생한 뉴스 현장을 전달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몰입 저널리즘을 처음 시도할 때, VR 헤드셋을 직접 만들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시험에 들어갔다. 2009년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USC)대학에서 저널리즘학과, 엔지니어학과, 비즈니스학과 학생들과 함께 저널리즘 콘텐츠 앱을 만들면서 스마트폰용으로는 만들지 말자는 제한을 뒀다.

 

 

아프리카나 그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디지털 콘텐츠에 접근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사야한다는 것은 저널리즘에 어울리지 않는 난센스(nonsense)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엠블러매틱 그룹의 다음 작품은 <프로젝트 시리아(Project Syria)>였다. 역시 큰 화제를 불러오며 VR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시리아 알레포 지역에서 민간인을 향해 로켓포가 떨어진 현장, 시리아 내전 상황과 난민 캠프의 참상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잠시나마 평화가 깃든 거리에 어린 소녀 하나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타나는 순간, “쾅!” 하고 로켓포가 터진다. 흙먼지가 이는 가운데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흩어지는 사람들 모두가 시청자의 눈앞에서 일어난 현실처럼 보였다. VR 저널리즘은 평소 뉴스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을 전혀 다른 감각적 체험으로 전화(轉化)해 체험자(독자)의 역할을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바꾸는 것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독자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아젠다

미국 마케팅 조사 전문지 마켓앤드마켓(Markets and Markets)은 오는 2020년이면 VR 저널리즘 시장 규모가 약 160억 달러(2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기술 로열티는 포함해 장비와 구성 요소(센서•디스플레이•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 분야까지 망라한 수치로, 새로운 ‘블루오션’의 등장에 관련 업계가 이미 들썩이고 있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통신사 AP, 신문사 뉴욕타임스, 방송국 NHK 등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오늘날 ‘VR 저널리즘 콘텐츠’는 대개 360도 촬영 영상을 일컫는다. 하지만 360도 영상이 모두 VR 저널리즘 콘텐츠인 것은 아니다. 가상현실은 어디까지나 실제 있는(있었던)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가상’의 일이므로 원칙적으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이미지만 해당된다. 생생한 현장을 360도로 촬영한 후 전용 기기를 통해 관람하게 하는 경우, 이는 360도 영상일 뿐 가상현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 반면에 언론 보도에서 ‘VR 저널리즘’이라고 하면 가상현실 보도와 360도 영상을 한데 묶어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현재로서는 노니 드 라 페냐의 작품보다 360도 영상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국내 언론의 경우에도 대부분 360도 촬영 영상을 선보이고 있다. 가끔은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한다. 2015년 11월 뉴욕타임스가 내놓은 전쟁 난민 어린이 관련 보도 영상 <난민(The Displaced)>도 실제 촬영분과 가상현실을 절묘하게 조합해 몰입도를 높였다. 2015년 11월 5일, 뉴욕타임스는 VR 기사를 카드보드로 만든 VR 뉴스 앱 ‘NYT VR’을 공개해 100만 명 이상의 구독자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그 후 또 뷰어 또는 앱을 통해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 난민 문제를 다룬 <난민(The Displaced)> 시리즈를 출시해 VR 저널리즘의 모델을 보여줬다. ‘당신은 지금 뉴스 현장에 있다’는 월터 크롱카이트의 오프닝 멘트를 재현한 셈이다. 이밖에도 뉴욕을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VR 다큐 <워킹 뉴욕(Walking New York)>이 소개됐다. 또한 워싱턴타임스가 화성 표면을, ABC 뉴스가 북한 군대의 퍼레이드와 시리아 난민을, BBC가 프랑스 북부의 시리아 난민 캠프를 각각 360도 영상으로 구독자에게 선보였다. 이처럼 촬영된 VR 영상의 기능은 전통적인 저널리즘이 갖고 있던 특권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해체했다. 의제를 설정하고 진실을 폭로해 사회를 바꾸겠다는 의제 설정(agenda setting)이 그것이다. 언론사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의제가 아니라 독자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의제가 중요한 의제가 된 것이다.

 

 

일시적인 현상인가 지속적인 혁신인가

19세기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약 150년간 저널리즘은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20세기 말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터넷 뉴스가 등장하면서부터 저널리즘은 한층 빠르고 과격하게,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게 변해왔다. 분명한 건 뉴스 콘텐츠와 그 소비자 간 상호작용(interaction)이 점차 강화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몰입도도 날로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VR 저널리즘은 그 첨단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VR 저널리즘에서 ‘강력한 몰입도’는 기대 효과가 큰 만큼 예상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소비자가 현실과 가상 간 경계를 불분명하게 여기도록 할 수 있다”는 걱정이 대표적이다.

직업윤리를 엄격하게 교육받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보도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VR 저널리즘 환경에선 누구든 콘텐츠를 만들어 관객을 현장으로 이끌 수 있다. 비윤리적 보도가 횡행할 경우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는 구조다.

 

 

일부에서는 “VR 보도물을 제작하려면 상당한 제작비를 감수해야 하므로 결국 ‘돈 있는 소수’를 위한 메시지만 제작, 소비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관련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VR 저널리즘은 더더욱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한 문제를 낳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의견만큼은 분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VR 저널리즘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으며,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는 뉴스를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뉴스를 보도할 뿐이다.” 월터 크롱카이트가 남긴 이 말의 효력 여부는 이제 스타 앵커맨의 원조라는 명성이 아니라, VR 저널리즘이 보도하는 스토리의 객관성과 진정성 문제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VR 저널리즘은 아직 여러 논쟁을 거느린 채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일시적인 현상인가 지속적인 혁신인가, 또는 기술 중심의 혁신인가 콘텐츠의 혁신인가에 대한 귀납적이거나 연역적인 답변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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